조선 중기의 문신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 1562~1624)의 관련 전적들이다., 소장 전적은 신지제(申之悌)와 아들 신홍망(申弘望, 1600~?) 및 그 후손과 관련된 필사원본(筆寫原本)과 고문서이다. 신지제(申之悌)는 의성 출신으로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 요직을 역임하였다. 창원부사 재직 때에는 명화적(明火賊) 정대립(鄭大立) 무리를 잡은 공로로 교서를 받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으며, 인조 때에는 승지를 역임하였다. 의성에 장대서원(藏大書院)을 세워 지방 자제의 교육에 힘썼고, 사후 이 서원에 봉향되고 있다. 저서로 『오봉집(梧峰集)』 4책이 있다. 신지제(申之悌)의 아들 신홍망(申弘望)은 호가 호송(弧松)으로, 1639년(인조 17) 급제한 후 주서ㆍ정언을 역임하였고, 한때 벽동(碧潼)에 유배되었으나 효종 때 지평ㆍ풍기군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호송집(弧松集)』 2책이 있다. 소장 전적은 모두 8종 5책 78매로, 이 중 필사원본으로는 『영남동도회첩(嶺南同道會帖)』, 『장사목록(長沙目錄)』,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17세기말 추정), 『재사종의(齋舍宗議)』, 『구미보신장도목완의(龜尾洑新粧都目完議)』, 『갑진걸물절왜사소(甲辰乞勿絶倭使疏)』 등 오봉 친필의 소문초(疏文抄)와 기타 문집 소재 문초 등 6종이다. 『장사목록』은 1652년(효종 3) 신홍망이 탄핵사건으로 평안도 벽동에 유배 갔을 때 쓴 일기이고, 『재사종의』는 기제(忌祭)ㆍ묘제(墓祭)ㆍ묘위토(墓位土)에 관한 완의(完議)이다. 『구미보신장도목완의』는 신지제(申之悌)가 축보한 구미보에 관한 내력과 완의로, 구미보 몽리호(蒙利戶)의 답수(畓數)와 경작자 명단, 수세액 등을 기재한 기록이다. 고문서로는 신지제(申之悌) 부자의 교지(敎旨)ㆍ첩지(牒旨) 등 49장, 유지(有旨) 2장, 교서(敎書) 1장, 시권(試券) 3장, 혼례간(婚禮柬) 2장, 신지제(申之悌)의 녹패(祿牌) 3장, 준호구(准戶口) 22장, 신도일(申道一)의 종가입후표문(宗家立後標文: 입양문서) 1장 등이 있다.
의성군 봉양면기 중심지인 도리원에서 동북쪽으로 불과 2Km 떨어진 곳에 그 겉모습이 매우 예스런 마을이 있다. 바로 아주신씨(鵝州申氏) 집성촌인 구미리(龜尾里)다. 1612년에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1562-1624)에 의해 택리(擇里)된 그 마을에는 지금도 고색창연한 기와집과 정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뿐더러 도와(陶窩) 신정주(申鼎周.1764-1827)가 그 터의 내력 에 대해 기술해 놓은 '구장지(龜莊志)'도 전해온다.
필자가 과문하지 않다면 그 책은 우리 나라 최초의 마을지일 가능성이 높다. 남다른 역사를 가꾸어 온 마을답게 구미리는 물론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 남대천(옛 長川)과 쌍계천(옛 下川)이 수구(水口: 물이 빠져 나가는 곳)를 이루는 섬개들 끝 부근에서 합류할 뿐만 아니라 북쪽의 가마 봉 주릉을 병풍삼은 마을터 앞쪽으로 넓은 구미들이 펼쳐져 있어 판국 자 체가 무척 밝고 명랑하다. 게다가 마을공간 구성요소 하나 하나가 모두 제 자리를 찾아 입지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퍽 짜임새가 있다. 크게는 주택 들과 경지, 못(池)이, 그리고 작게는 종택과 정자 같은 것이 마땅히 있을 만한 자리에 모두 터잡고 있다는 말이다. 구미리처럼 주어진 삶터 자연에 크게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적소(適所)마다 최선책의 유관적합한 토지이용 을한 마을터를 필자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하늘이 내린 복지(福地)를'좋 은 터'라 한다면, 구미리는 주어진 삶터의 고유한 멋까지 살려놓은 그야 말로 '훌륭한 삶터'의 전형이라는 생각이다. 부분(특정 삶터의 토지이용) 이 전체(국토 전체의 토지이용)의 귀감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구 미리와 같은 마을터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삶터다운 삶터를 만드는 데 사람들의 토지관(혹은 지리관)이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를 암시 해 주고, 또한 아름다운 삶터를 구축하는 데 절제와 적소성(適所性)을 겸 비한 토지이용이 얼마만큼 소중한가를 일깨워 주는 터, 그 터가 곧 구미 마을터인 것이다.
구미리는 주산격인 가마봉(신성하고 거룩하다는 뜻의 옛말 '감'에서 '가 마'가 생겼을 법함) 남쪽자락의 동부(옛 東邊)와 서부(옛 西邊), 그리고 못안 마을(옛 池內村)로 구성돼 있다. 그중에서 오봉공(公)이 입향하면서 처음 터잡은 곳은 지내촌이다. 그는 이웃한 상리(上里 혹은 新禮洞)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마도 구호(龜湖: 구미리의 옛 이름)의 터 됨됨이를 훤 히 꿰뚫고 있었을 게다. 그곳은 가마봉 지맥이 원(圓)처럼 둥글게 감싸고 있고, 그나마 트인 개구부 쪽으로는 못(池)이 조성돼 있어 거의 별외의 세 계나 다름없다. 지금도 구미못안 마을에 들어가면 선경과도 같은 그 지세 맛에 흠뻑 도취되어 저절로 안빈낙도 하고픈 마음이 이는데, 예전에는 오 죽 더 했겠는가.
관직에서 은퇴한 그가 그런 적소를 골랐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과연 풍수에 정통한 유학자였던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가 그곳을 새로운 삶터로 정할 때 풍수를 고려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200여년 뒤에 저술된 '구장지'에서조차 기껏해야 구미리의 주산과 안산 정도를 논하고 있을뿐인데, 어찌 그가 풍수를 알고 그 터에 복거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공교로운 일은 그 터가 필자의 눈에는 회룡은산형(回龍隱 山形)의 대길지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반적인 지세가 수성 산형(水星山形)인데다 지맥이 Ω와 같은 형태로 굽이 도니 영락없이 용이 산에 돌아와 숨는 모습이다. 비록 선인(善人)에게는 하늘이 명당을 모르게 내린다는 옛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그런 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 치고는 너무나 기묘하다는 생각이다. 공교로운 일은 비단 그뿐이 아니다. 구미들 너머로는 왼쪽부터 차례로 삼보산(三寶山), 구산(龜山), 천방산(天 放山.선방산은 잘못된 표기임), 금산(錦山) 등이 이른바 안산으로서 그 대 길지를 받쳐주고 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악산(惡山)인 것이 없다. 특히 구미리에서 바라보이는 구산의 모습은 꼬리를 늘어뜨리고 엎드려 있는 거 북의 형상을 그대로 쏙 빼닮았다. 바로 그런 구산의 모습이 구호라는 지명 을 구미로 바꾸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구산 남쪽자락의 구산리 사람들이 그 꼬리부분을 오히려 거북의 머리로 여기고 있음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무릇 그 어떤 산도 보는 위치에 따라 천변만화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것인즉, 더군다나 구미리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삶터를 조선 8대 구미리 중의 한 곳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 자연 을 마음속으로 내면화하는 일이 얼마만큼 소중한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설상가상 이제부터는 또 구미리가 용과 거북이라는 두 영물이 조화를 이 루는 길지 중의 길지로 재인식될 터이니, 그 또한 어찌 공교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쏜가.
그런 관념적인 터 인식에 못지않게 구미리의 실제 인문 경관(景觀)들도 하나같이 빼어난 입지성을 뽐내고 있다. 구미못으로 올라가는 입구 도로 바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종택과 오봉공 사당만 봐도 그렇다. 그 둘은 원래 지내에 있었으나 후일 모두 지외(池外)로 옮긴 것이다. 아마도 구미 못의 저수량을 늘리다 보니 이건(移建)이 불가피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오 봉공이 일찍이 구미보(龜尾洑)를 축조하여 저 길부(길천1리)에서 구미리까 지 장장4Km에 달하는 관개수로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 후손인들 어찌 가 문의 영화보다 대동의 삶을 더 중시하지 않았겠는가. 그러고 보면 마치 여 의주와도같은 반월형의 동산(東山)자락에 원래부터 있었던 낙선당(樂善堂: 오봉공의 獨子 孤松 申弘望의 서당)과 더불어 종택과 오봉공의 사당이나 란히 함께 들어선 것도 어찌 생각하면 보본반시의 아주신씨 가문 복록인듯 하다.
구미리 조상들의 삶터 이용 지혜는 서원과 정자 터 선정, 그리고 명당 지키기 행태에서 그 극치를 보여준다. 오봉공이 강서(講書)하기 위해 복축 (卜築)했다는 장대리(藏待里) 묵방산(墨坊山 혹은 강당산) 기슭의 강당(지 금의 장대서원)터,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1731-1812)이 후학을 양성하 기 위해 지었다는 금산(錦山)자락 쌍계천변의 금연정사(錦淵精舍: 1981년 에 금산서원으로 승격)터, 그리고 구미못안 마을에 있는 삼지당(三知堂.申 漢傑의 강학지소)과 창암정(蒼巖亭.申熙大의 유덕을 기려 1981년에 후손들 이 세운 정자)터 같은 곳에서 폐부 깊숙이 다가오는 느낌을 한번 비교해보 라. 마음이 갑자기 굳세지는 곳도 있고, 마음이 물 흐르듯 맑아지는 곳도 있으며, 처연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곳도 있다. 제각기 다른 그런 느낌이 바로 터가 지닌 맛이자 위력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오봉공과 관계있는 장대서원 터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는 자신이 태어난 상리에 매우 가까이 위치한 강당산을 유년시절부터 즐겨 찾았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가 새로운 삶터를 구미리에 정했으면서도 굳이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강당산 기슭에 강학소를 마련했다는 것은 곧 그가 그 터의 됨됨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장대서원 터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실로 호쾌하기 이를 데 없다.
쌍계천변의 넓은 들을 굽어보고 천방산 주릉을 응시하는 그 앉음새는 남 아의 기상 바로 그 자체다. 게다가 뒤를 두르고 있는 강당산의 자연 석병 (石屛)과 서원터 주위로 군데군데 널려 있는 큰 바윗돌들은 선비다운 굳은 의지와 절개를 심어주기에 안성맞춤인 자연지물이다. 혹자는 왼쪽 멀리 떨 어진 산능선 凹처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의흥 고을 선암산의 엿봄을 꺼려할 지 모르겠으나 그 봉우리의 형상은 알고 보면 어사모(御史帽)로 얼 마든지 관념 전환될 수 있는 내용이다. 여헌 장현광이 '주역(周易)'에 나 오는, "덕기를 몸에 감추고(藏器於身) 때를 기다려 움직인다(待時而動)"는 말에서 장대라는 글자를 따와 서원 이름을 지어준 것도 어찌 생각하면 바 로 그런 터에서 길러진 호쾌한 기상을 남용하는 것을 경계한, 일종의 지명 비보책(地名 裨補策)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구미리 사람들의 그같은 지혜로운 삶터 활용 정신은 일제시대 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일제는 원래 대구와 안동을 잇는 신작로를 구 미 마을안을 통과하도록 설계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가만 있을 리는 만무 한 일, 조정 끝에 그 노선은 결국 마을로부터 멀리 밀려나가게 되었는데, 현재의 구안국도가 구미마을로부터 남쪽으로 5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동서 로 길게 나있는 것도 알고보면 그런 내력이 있다. 그 덕분에 오늘날 구미 리 사람들이 그야말로 고즈넉한 주거 환경을 향유할 수 있게 됐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렇다고 구미리 터에 전혀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을이 밖으로 너무 노출돼 있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마을 바로 앞이라도 좋고, 국 도변이라도 좋으니, 동서로 길게 비보숲을 만들어 밖에서 마을을 쉬이 들 여다볼 수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면 환경심리적으로도 안정감 을 확보할 수 있을 뿐더러 마을의 품격도 한층 높아진다. 젊은이들이 모두 마을을 떠나 봉양면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봉양초등학교마저 폐 교된 마당인데, 삶터를 가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다소 의아 해 할 사람도 있겠지만 터라는 것은 꼭 그런 게 아니다. 교통과 정보통신 망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의 공간 극복 한계력도 자연히 증대될 것인즉, 그 야말로 '터다운 터'를 지키고 있는 구미리가 각광받는 날이 반드시 오게 돼있다.
"인간의 논리는 덧없는 것이지만 땅의 논리는 영원한 것이다." 그것이 곧 구미리 터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됨됨이가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 는 교훈이지 않은가.풍수학자.지리학박사
가마봉 줄기를 병풍삼고 넓은 구미들과 남대천을 끼고 있는 의성군 봉양 면 구미마을 전경. 앞쪽 가운데 둥글게 볼록 솟은 산이 동산(東山)이며, 그 왼쪽으로 움푹 들어간 곳이 못안마을이다. 밝고 명랑한 터 기운과 합리 적인 토지이용이 돋보이는 마을이기는 하지만, 비보숲을 만들어 무방비 상 태로 노출돼 있는 마을 모습을 가릴 필요가 있다.
삼지당에서 내려다본 못안마을 정경. 선경과 다름없는 풍광을 지닌 이 터는 어딘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오른쪽 앞으로 보이는 창암정 터는 마치 한 척의 배가 물 위로 나아 가려 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묵방산(속칭 강당산)의 석병을 배경으로 터잡고 있는 장대서원 모습.
마을 맨 위쪽 왼편 작은 건물이 경현사(景賢祠)이고, 그 오른편 큰 건물 이 바로 장대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이다. 원래 오봉공 신지제의 강학 지소였던 그 터에 올라보면 남아의 호쾌한 기상이 저절로 느껴진다.